Empty to Be Filled, 90x90x10cm (each), Mixed media (UV protected poly-urethane), 2012
[뉴스선인사회= 최영민기자]
인생에서 한번은 뱃머리에 서게 된다. 깊은 심연의 바다를 바라보며, 지나온 시간과 이제는 마지막이 될 이 순간에 안녕을 고(告) 할때, 떠나는 사람은 과연 남겨질 사람의 마음도 생각하는 것일까? 이번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는 이성미의 <Empty to Be Filled>전은 그 순간 이후, 그만 남겨져 버린 사람의 이야기이다.
부서짐_솟구침
작업대에 앉아 고개를 숙이고, 폐차 공장에서 모아온 부서진 차 유리의 파편들을 붙이고 있는 그녀의 손가락은 규칙적이지만 일정한 리듬을 타고 움직이고 있다. 이 손 끝을 통해 만들어지는 끝없는 배열과 반복 속에서, 그녀에게 한번 씩 의식을 놓아버리게 되는 무아의 순간이 오고 가기도 한다.
하지만 이처럼 지루하고 긴 반복을 통해 결국 연 푸른 빛을 중심으로 소소한 작은 빛들을 수없이 반짝이며, 크고 둥근 달처럼 창백하고 도도한 <Empty to Be Filled (Let it go… it will be filled again…07142012)>가 솟아오른다. 부서진 유리 파편들의 비명 속에서 조용히 솟아오른 이 비취색의 작품은 이성미 작가가 그동안 보여줬던 작품 세계를 함축적으로 담아내고 있다. 우선 사고로 깨진 자동차 유리를 사용하고 있다는 점이 그렇다. 그녀가 부서지고, 깨진 유리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우연한 일이었다. 키우던 강아지를 산책시키기 위해 나온 어느 날, 그녀는 브루클린 거리의 한 모퉁이에서 깨지고 흩어진 유리를 보게 되었다.
이때 그녀는 거리에 무가치하게 버려지고, 깨진 투명한 유리가 낯선 나라에서 불편하게 겉돌고 있는 자신의 모습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버려진 사물에 대한 구체적인 공감(共感)은 이후 이성미 작가가 방어적으로 정체성을 확보하고자 하는 여타의 한국 작가들과의 차별성을 두게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왜냐하면 이를 계기로 그녀는 설익은 ‘민족’이나 ‘전통’의 개념을 추상적으로 끌어오기 보다는, ‘작가’와 ‘아시아 출신 여성’이라는 개별적인 정체성을 작품 속에 투영하기 위해, 깨진 유리 같은 구체적인 매체를 통해 현실화 된 자기표현을 시도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버려진 것들 그리고 연약한 것들에 대해 자신이 느끼는 특별한 감성에 대해 깊이 매료되어, 이들을 재해석하고 새로운 모습으로 탄생시키는 자신의 조형 언어 세계를 열어 간 것이다.
그러므로 폐차 공장의 노동자들로부터 받아 온 산산이 부서진 유리조각, 특히 사고로 인해 부서진 차 유리창 같은 것들을 마치 모자이크의 그림 맞추기를 하는 것처럼 반복적으로 작업을 하면서, 그녀는 지루해하고 힘들어 하지 않는다. 흉물스러운 것들에게서 새로운 의미를 찾아내고, 그 속에 숨겨진 슬픔을 끌어내어 현실 공간 속으로 아름다운 모습을 솎아 올려 내는 것에서 그녀는 무한한 기쁨을 느낀다. 또 이렇게 만들어진 작품들은 매우 장중하고 견고해 보이지만, 사실은 그닥 무게가 많이 나가지는 않는다. 바로 이들의 지지체가 가벼운 스티로폼이기 때문이다. 그 위에 티끌 같은 유리를 수공업적으로 반복, 집약적으로 배열함으로써 서서히 제대로 된 면적을 찾아나가고, 희미한 조각들이 서로 부대끼며 빛을 발하기 시작하면 이제 작품들은 균형과 불균형 사이의 불협 화음에서 찰나적으로 깨어진 틈이 만드는 빛의 미학을 보여준다.
이 틈은 그녀의 초기 작품인 <Diary of Fall 04>(2004) 부터 그 시작을 알 수 있다. 이 작품에서 유리는 날카롭게 단절된 세로 형태로 배열되어 있다. 깨진 유리는 서로 배합되어 전체적으로 둥근 형태의 형상을 만들고 있는데, 이 공간은 연못 같기도 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하늘의 한 조각 같기도 하다. 하지만, 조금 더 작품과 마주하고 바라본다면 사실은 이것이 심상(心象)의 거울이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다가서서 손을 내밀거나 발을 들여 놓으면 한 순간 베어버리겠다는 날 선 마음의 모습은 당시 그녀가 세상을 바라보던 예민한 시각의 한 단면이기도 하였다. 반면 이번에 선보이는 <The Burden in Different Perspectives: 04132012>는 검은 종유석 같은 형태를 띠며 좀 더 유연하고 단단해진 모습을 보이고 있다. 이 작품은 2010년 뉴욕의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렸던 개인전에서 처음 선보였던 <Melting>시리즈와 동일한 맥락에 있는 것으로, 사실 이번 전시에서 현재 그녀의 마음을 가장 구체적으로 시각화시킨 것이기도 하다. <Melting>은 중첩적으로 녹이고 쌓이는 과정이 반복되어, 마치 엉켜 붙은 눈물과 콧물 혹은 아물어 있는 오랜 상처 같은 흔적을 담은 비취색의 커다란 고드름 같은 이미지를 하고 있다. 마치 물체를 가지고 드로잉 하는 것 같은 느낌으로 작업했다는 이 작품은 깊은 상실감의 시각적 증거물이기도 하다.
당시 그는 가장 믿고 사랑하는 아버지를 갑자기 잃게 되었고, 그 슬픔과 상실감의 한가운데서도 밥을 먹고, 잠을 자고, 작품을 만들고, 전시를 해야 했다. 부모로부터 받은 사랑은 내면 깊숙이 스스로의 존엄을 지키는 마음으로 자리 잡게 된다. 그 가운데 아이는 좋은 어른으로 성장하게 되는 것이다. 그녀에게 자존감의 근원이었던 아버지를 이별 인사도 못한 채 보내야 했던 일은 큰 고통이었겠지만, 이는 잔인하게도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맞아야만 하는 한 순간이고 또한 자연이기도 하다. 그녀 역시 자신이 느끼는 상실감이 눈물 같은 분비물들이 되어 쌓이고, 응고되고, 또 풀어지면서 결국은 자연스럽게 소멸되고 내버려져 편안해 지기를 원하였지만, 결국은 켜켜이 쌓인 상처로 침잠되어 누에고치 같은 형상으로 매달린 것이 되어 버렸다.
한국으로 돌아와 익숙하지만 낯선 작업 환경 속에서, 이 작품은 스티로폼에 자동차 유리 파편을 붙인 새로운 형상으로 변주되었는데 바로 그 작품이 <The Burden in Different Perspectives: 04132012>이다. 슬픔보다는 마음의 하소연이자 압박감을 표현 한 것이라는 이 작품은 마치 자신만을 위한 일기 같은 것이라고 그녀는 토로한다. 얼핏 보면 시커멓고 거대한 송곳니 모양의 형상이 여러 개 천정에서 내려오는 위압적인 모습이지만, 조금만 시각을 비틀면 검은 오닉스가 수천 개 박혀 수많은 빛이 반짝이는 샹들리에처럼 화려하고 아름답다. 하찮은 재료들은 훨씬 정교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다시 태어나고, 여기에 그녀는 스스로가 살아가는 이유가 있다고 중얼거린다.
이처럼 그녀는 이번 전시를 통해 훨씬 더 기하학적 형태의 정제된 모습의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다. 3개의 피스로 이루어진 <Empty to Be Filled (It really hurts: Jan. 8, 2012)>의 경우도 원의 안쪽 면적이 마치 달의 변화처럼 표현되고 있는데, 이 또한 그가 겪고 있는 심상의 구체적인 표현이기도 하다. 채우기 위해 비워지는 이 모습은 반어법적 표현이기도 하지만, 현실을 놓아버림으로써 더 큰 하늘의 운용 원칙을 받아 안는 자연의 일부분으로써 사람의 모습과도 흡사하다. 그리고 깨지고 부서졌기에 가까이서 보면 쓸모없고 연약한 것이지만, 조금만 떨어져 보거나 시각의 각도를 바꾸면 반짝이는 아름다운 그 무엇일 수 있는 사람들의 한 모습이기도 한 것이다. 그렇다. 그녀는 깊은 심연에 가라앉아 있고, 이제 부서진 한 가운데에서 솟구치고 있는 것이다.
최 영민 인턴기자|master@newssuni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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